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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by 오키드(아이꾸준) 2024.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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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

오늘은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누구한테도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나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오히려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 죽은 자를 언급하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치는 않는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그간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확히 알아보고, 이를 통해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되새긴다.
 

1. 돈은 못벌어올 망정 돈을 가져다쓰는 무능력자


어머니는 26살이라는 나이에 나를 낳았다. 그리고 4년뒤 동생을 낳는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는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다. IMF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시기상 IMF보다는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 권고사직을 당한게 아닐까 싶다. (아래 사진을 보면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했던 기간이 상당히 짧은 걸 볼 수 있다.)
아버지는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하셨다. 어릴때 집에 유독 템플릿 자, 제도 관련 도구들이 많았던게 그 이유였던 것 같다.

나의 건강보험 자격득실내역

 
둘째를 낳았는데 직장을 오히려 잃어버린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학원, 과외 등등을 거쳐 지금까지 해오고 계신 옷가게 점원 일을 그때부터 시작하셨다. 
 
어릴때는 몰랐다. 아버지가 왜 집에 있는지를. 항상 학교 끝나고 집에가면 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웬 이상한 노니주스(?)를 한잔씩 꼭 나에게 먹였다. 노니주스는 집 한켠에 박스째로 쌓여있었다. 그때는 뭐였나 싶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다단계 업체에서 비싸게 주고 사온 건강기능식품이였던 것 같다.
집에는 이런 다단계업체 제품(암웨이, 뉴스킨, 애터미 등)이 많았다. 아마 다단계 판매로 돈을 벌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항상 친인척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렇게 남을 욕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설득해서 물건을 팔겠는가. 

다단계 대표 쓰리 였구만..

 
어머니는 계속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아버지가 돈을 벌어오게끔 하도록 친인척들에게 취업을 부탁하였다. 지금은 식당에 가면 전용 포스(pos)기계를 흔하게 볼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아래 사진처럼 작은 카드결제기계가 많았다. (지금도 급한 결제용으로 쓰기 위해 영업장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결제기계를 대여해주는 거였는지 설치해주는 거였는지 모르겠지만, 포스기 영업사원일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이것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업체 사장님이 친척분이었는데 감사하다고 보답은 못할망정 친척분과 갈등만 만들었다)
 
외가쪽의 부모님께서 딱하게 보신건지, 가게를 차려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짓이다. 그때 상표가 옷가게였는데 체이스컬트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차려준 옷가게도 얼마가지 못했다. 더 웃긴건 지금 하는 브랜드는 별로니 임페리어니 슈페리어니 하는 브랜드로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왜 맨날 불평만 하십니까..)
그러다 친인척들에게 거금을 빌려 음식점을 시작했다. 분식집이었는데 처음에는 손님이 바글바글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노동으로 돈을 많이 벌어들인다는 것에 밝은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가게 하나 더 차려서 돈을 끌어모으자는 생각이었는지 음식점을 하나 더 차린다(그것또한 친인척에게 돈을 빌려서).
 
(노동으로 열심히 번 돈으로 사업을 했어야 하는게 아닐까.. 남들한테 돈을 빌려서까지 식당을 차리는 건 엄청난 리스크를 지는 일이다. 지금의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한다. 우선 종잣돈을 모을때까지 죽어라 일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겠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본인의 역량으로는 가게 운영이 힘들었는지 옷가게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던 어머니까지 식당일로 끌어들인다. 나는 이때 고등학생이었기에 집안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다 기존에 차린 분식집은 권리금을 받아 양도하고, 새로 차린 음식점만 운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오픈빨도 있었고 꽤나 장사가 잘 되었던 것 같았다. 방학에는 나에게 알바비를 명목으로 음식점에서 서빙, 조리를 맡기기도 했다. 뭐 그때는 부모님을 돕는다는 생각에 좋기도 했고 새로운 일을 배운다는 마음도 있어서 생각없이 했다. 
(방학때 공부를 했어야지...)
하지만 프랜차이즈 식당이 으레 그렇듯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도 맛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어느정도 매출은 감소하다가 일정해졌다. 

세이노의 가르침에 나온 것처럼, 배달, 편의점 알바 등 진입장벽이 낮은 일이라도 해야 했다. 몸은 힘들더라도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일 말이다. 나의 아버지이지만 몸이 힘든 일은 전혀 하지 않으려 했고 몸 편하게 떼돈을 벌 궁리만 했다는 게 너무나 안타깝다.

 

나의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전혀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집에 돈을 벌어오기는 커녕 오히려 다단계 사업으로 돈을 벌겠다는 말도 안되는 명분으로 유일한 수입원인 어머니의 월급을 가져갔다. 이때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졌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가 어떤 어린시절을 보냈기에 성실하게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친가 쪽은 부유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오히려 일을 열심히 하시고 일을 잘하셨던 외가 쪽이 훨씬 있는 집안이었다.
 

2. 잦은 흡연, 음주로 세상을 하직하다


임대를 너무 비싸게 들어갔는지, 지금의 매출로는 빚을 갚기가 어렵다는 계산이 들었는지 임대인을 어느순간 계속 욕하기 시작했다. '그년이 우리한테 사기를 친거야.', '죽여버리겠다' 등 자녀 앞에서 하기 힘든 말까지 서슴없이 하기 시작했다. 항상 화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어머니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네 아빠 암이란다. 말기래. 6개월 남았대.' 
사실 어느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술 마시고 하루 2갑씩 담배를 피워대는데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방학이 끝날때 개강기념(?)으로 친할머니를 포함해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당시 말기 암을 진단받은 상태였다. 식당에서 소화가 안된다며 방방 뛰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연히 하고 있던 음식점은 정리를 했다. (엄청난 손해와 빚을 지고) 나는 당시 대학생이었고 가족과 떨어져 지냈기에 아버지가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른다. 내가 군에 입소할때 아버지가 참석할 정도로 일상생활은 가능했으나 내가 입소한 후에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 훈련소 수료 후 2박 3일 휴가때 아버지를 본 게 마지막이었는데,  그때 아버지는 호스피스 병동에 있었다. 몸은 앙상하게 뼈만 남아있었고, 암세포가 온 몸에 퍼졌는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의 임종을 나도 모르게 예감하고 아버지에게 '그간 고생하셨어요' 라는 마지막 한마디로 군 훈련소로 복귀했다.


그렇게 군대 훈련소에서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된다. 갑자기 일개 훈련생인 나를 찾는 중대장의 모습을 보고 올 것이 왔구나 예상했다. 당시에는 군대에 휴대폰 반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가족과 연락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상주로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고등학교 동창들과 대학동기까지 찾아와주었다. 여기서 웃긴점은 정작 아버지 본인의 친구들은 단 한명도 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회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세상에 갖은 불평을 쏟아내고 그 스트레스를 술과 흡연으로 푼 나의 아버지. 그 결과는 폐암, 위암 4기라는 끔찍한 결과로 찾아왔다. 불과 50세의 나이에 불평불만만 늘어놓다가 돌아가셨다. 내가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건 일하는 방식과 술과 담배를 포함한 생활습관을 말한다. 

 

3. 오히려 행복해진 남은 가족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는 다시 훈련소로 복귀했다. 자대배치를 받고 신병이던 시절, 내무반 안에 있는 독서실에서 혼자 울었다. 소리가 새어나갈까봐 흐느껴 울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슬픔이었을까. 그때의 감정은 정확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고 정말 열심히 군생활을 했다.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게 그것 뿐이었다.
그리고 전역이 몇개월 안남았을 무렵, 생각이 너무나 많아졌다. '복학하고 무엇을 해야할까. 나는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지? 이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이런 생각들을 나도 모르게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답은 없었다. 


전역 후, 대학교 다니며 치열하게 살았다. 닥치는대로 공부했다. 한 학기에 21학점을 들으며 돈이 없어 학식중에서 가장 저렴한 라면만 일주일 내내 먹었던 적도 있다. (당시 15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거기에 근로장학이라고 해서 교내 일을 도우며 장학금형태로 임금을 받는 일도 했다. 친구들과 술자리는 거의 없었다. 왜? 돈이 없었으니까. 학점공부에 근로장학에 거기에 자격증 공부까지. 지금 생각해도 치열하게 살았다. 덕분에 지금은 누구나 알법한 직장에 다니고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아마 나에게 열심히 살라고 행동으로 보여주신 어머니의 뒷모습이 가장 큰 영향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 가족들에게 짐만 남기고 간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는 열망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은 우리 가족은 많은 짐을 떠안았다. 음식점을 차리기 위해 친인척들에게 빌린 몇억의 돈, 시도때도 없이 차를 바꾸고 남은 자동차 캐피탈 할부금. (빚은 상속이 되지 않아 다행이다.) 그나마 남아있는 건 1000만원 정도 납부한 국민연금이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빚을 다 청산하는 거다. 

 

어머니도 빚을 갚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하셨다. 남편을 잃었다는 충격보다는 오히려 족쇄에서 풀렸났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30년의 세월을 허송세월 보낸게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내 돈 모으며 살 수 있는게 너무나 감사하다고 하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우리 집의 사정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어머니는 버는대로 돈을 모으고 있다. 물론 그간 모으지 못한 돈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돈을 모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머니는 나에게 돈이 이렇게 통장에 모이는 게 정말 얼마만인지 모른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이다. (그간 얼마나 아버지가 돈을 가져다 썼는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나는 얼마전 서울 아파트 매매계약을 했다. 난생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했다. 대출을 많이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모은 종잣돈으로 아파트 매매 계약금과 중도금을 치뤘다. (이거 모으는데 4년이 걸렸다) 집을 사겠다고 돈을 모은 건 아니였다. 가진 게 없으니 돈이라도 모아놔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다 재테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나의 삶을 안정적으로 지켜줄 내 집은 꼭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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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나보다 4살이나 어린데, 결혼을 한댄다. (기특하네) 둘이 차곡차곡 모아서 전세집을 구했다는 것에 너무나 기특했다. 
 
돈이 없어도 어떻게든 두 아들을 키워내야겠다는 일념하나로 없는 살림에도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한 어머니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나는 한편 이런 두려움도 들었다. '내가 아버지 처럼 되면 어떻게하지?' 그래서 어머니께 여쭤봤다.
어머니는 나에게 '너희 둘이 아빠를 안닮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라고 말씀까지 하셨다.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부터 다르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될 수 없다는 게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그리고 나는 직장생활 5년차 정도 되었으나 자동차는 없다. 자동차가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지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다행히 자동차가 필요하지 않은 직장에 다니고 있고,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자동차는 구매하지 않을 것이다.


무능력한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나는 절대 무능력한 남자가 되지 않겠다' 라는 일념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어머니와 나와 동생을 힘들게 한 아버지는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거다. 그래도 내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해준 아버지였기에 아버지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음 한구석에는 남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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